책 이야기

[스크랩] 가을에 읽고 싶은 시...

요정맘 2015. 10. 28. 23:25

 



가을에는 / 강인호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 / 정진규 

          
                                                      
           풀벌레 울음소리들이 시간을 가을 쪽으로 
           애써 끌어당긴다 
           밤을 지새운다 
           더듬이가 가을에 바싹 닿아 있다
           만져보면 탱탱하다 팽팽한 줄이다
           이슬이 맺혀 있다

 
풀벌레들은 제가 가을을 이리로 데려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풀벌레 울음소리들은 들숨과 날숨의 소리다
날숨은 소리를 만들고 들숨은 침묵을 만든다

 
맨 앞쪽의 분명함으로부터 맨 뒷쪽의 아득함까지
잦아드는 소리의 바다,
그 다음 침묵의 적요를 더 잘 견딘다
짧게 자주자주 소리내는 귀뚜라미도
침묵이 더 길다


다른 귀뚜라미들이 서로 침묵을 채워주고 있다
열린 온몸을 드나들되 제 몸에 저를 가득 가두어
소리를 만든다
나는 이 숨가쁜 들숨을 사랑하게 되었다.



 



가을 / 조병화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그 어리석음을 알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아, 얼마나 세상사 인간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돌아갈 뿐이다.




출처 : 아름다운 세상 -아세향-
글쓴이 : 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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